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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고 싶은 글

  세밑에 오는 눈
  이정숙
  

세밑에 오는 눈

- 신경림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등과 가슴에 묻은 얼룩을 지우면서
세상의 온갖 부끄러운 짓, 너저분한 곳을 덮으면서
깨어진 것, 금간 것을 쓰다듬으면서
파인 길, 골진 마당을 메우면서

밝은 날 온 세상을 비칠 햇살
더 하얗게 빛나지 않으면 어쩌나
더 멀리 퍼지지 않으면 어쩌나
솔나무 사이로 불어닥칠 바람
더 싱그럽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창가에 흐린 불빛을 끌어안고
우리들의 울음, 우리들의 이야기를 끌어안고
스스로 작은 울음이 되고 이야기가 되어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어서





세 밑

- 김 지 하


일산종합시장
고양체육관
체이스컬트
농협

틈투성이다

틈 사이로 여러 갈래
가느다란 골목길

가시버시 세 쌍이
아이 하나 데리고
노래 부르며 올라간다

노래 아직
내게 들리지 않고

짐작은
아리랑,

하늘은 반지 같은
흰 초승달 끼어

세밑
아직
멀었다.




세밑거리

-박종영


우리,
광활한 벌판에서
훨훨 나르던 날개 접고
한 해의 죽음을,
자유롭게 묻고 있구나

결빙을 내고 있는
은혜로운 시간,
따스한 눈물은
풀리는 마음에 시름의 배를
띄워 보내고,

길 위에는 수북이
오래된 이름들이 불평 없이 쌓이고
나도,
한 축 끼어 층을 이루고 있구나





12월령 - 불씨

-유 안 진



섧어라 남이 알까
불씨 한 알 가슴에 감추어

삭풍으로 깡추위로
바알갛게 달구어 가며

뉘 이름에다 불지르랴
다시 노리는 겨울증오.





12월의 엽서

- 이 해 인


또 한해가 가 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한해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 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지요
해야 할 일 곧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남에게 마음 닫아 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합니다.

같은 잘못 되풀이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밖엔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쓰고
모든 이를 용서하면
그것 자체로 행복할텐데......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할 것
너무 많아 멀미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나를 키우는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12월의 촛불 기도


-이해인


향기 나는 소나무를 엮어
둥근 관을 만들고
4개의 초를 준비하는 12월
사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우리 함께 촛불을 밝혀야지요?

그리운 벗님
해마다 12월 한 달은 4주 동안
4개의 촛불을 차례로 켜고
날마다 새롭게 기다림을 배우는
한 자루의 촛불이 되어 기도합니다

첫 번째는 감사의 촛불을 켭니다
올 한 해 동안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해서
아직 이렇게 살아 있음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기뻤던 일, 슬펐던 일, 억울했던 일, 노여웠던 일들을
힘들었지만 모두 받아들이고 모두 견뎌왔음을
그리고 이젠 모든 것을 오히려 '유익한 체험'으로
다시 알아듣게 됨을 감사드리면서
촛불 속에 환히 웃는 저를 봅니다

비행기 테러로 폭파된 한 건물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뛰어나오며
행인들에게 소리치던 어느 생존자의 간절한 외침
"여러분 이렇게 살아 있음을 감사하세요!" 하는
그 젖은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두 번째는 참회의 촛불을 켭니다
말로만 용서하고 마음으로 용서 못한 적이 많은
저의 옹졸함을 부끄러워합니다
말로만 기도하고 마음은 다른 곳을 헤매거나
일상의 삶 자체를 기도로 승화시키지 못한
저의 게으름과 불충실을 부끄러워합니다
늘상 섬김과 나눔의 삶을 부르짖으면서도
하찮은 일에서조차 고집을 꺾지 않으며
교만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날들을
뉘우치고 뉘우치면서
촛불 속에 녹아 흐르는
저의 눈물을 봅니다

세 번째는 평화의 촛불을 켭니다
세계의 평화
나라의 평화
가정의 평화를 기원하면서 촛불을 켜면
이 세상 사람들이 가까운 촛불로 펄럭입니다
사소한 일에서도 양보하는 법을 배우고
선과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는
평화의 길이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촛불 속에 빛을 내는
저의 단단한 꿈을 봅니다

네 번째는 희망의 촛불을 켭니다
한 해가 왜 이리 빠를까?
한숨을 쉬다가
또 새로운 한 해가 오네
반가워하면서
다시 시작하는 설렘으로 희망의 노래를
힘찬 목소리로 부르렵니다

겸손히 불러야만 오는 희망
꾸준히 갈고 닦아야만 선물이 되는 희망을
더 깊이 끌어안으며
촛불 속에 춤추는 저를 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성서를 읽으며 기도하고 싶을 때
좋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마음을 가다듬고 촛불을 켜세요
하느님과 이웃에게 깊이 감사하고 싶은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촛불을 켜고 기도하세요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하고 힘들 때
촛불을 켜고 기도하세요

촛불 속으로 열리는 빛을 따라
변함없이 따스한 우정을 나누며
또 한 해를 보낸 길에서
또 한 해의 길을 달려갈 준비를
우리 함께 해야겠지요?




겨울 나무

- 장 석 주


잠시 들렀다 가는 길입니다
외롭고 지친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빈 벌판
빨리 지는 겨울 저녁 해거름 속에
말없이 서있는
흠없는 혼
하나
당분간 폐업합니다 이 들끓는 영혼을
잎사귀를 떼어 버릴 때
마음도 떼어 버리고
문패도 내렸습니다
그림자
하나
길게 끄을고
깡마른 체구로 서 있습니다




겨울 풍경

-박남준

겨울 햇볕 좋은 날 놀러가고
사람들 찾아오고
겨우 해가 드는가
밀린 빨래를 한다 금세 날이 꾸무럭거린다
내미는 해 노루꽁지만하다
소한대한 추위 지나갔다지만
빨래 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쩍 버썩 뼈를 곧추세운다
세상에 뼈 없는 것들이 어디 있으랴
얼었다 녹았다 겨울 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 그러하리
언젠가는 저 겨울빨래처럼 뼈를 세우기도 풀리어 날리다가
언 몸의 세상을 감싸주는 따뜻한 품안이 되기도 하리라
처마 끝 양철지붕 골마다 고드름이 반짝인다
지난 늦가을 잘 여물고 그중 실하게 생긴
늙은 호박들 이 집 저 집 드리고 나머지
자투리들 슬슬 유통기한을 알린다
여기저기 짓물러간다
내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한다 호박을 자른다
보글보글 호박죽 익어간다
늙은 사내 하나 산골에 앉아 호박죽을 끓인다
문 밖은 여전히 또 눈보라
처마 끝 풍경소리 나 여기 바람 부는 문밖 매달려 있다고,
징징거린다
2007-12-17 13:2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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