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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고 싶은 글

  2007년의 가을을 맞으며
  이정숙
  

가을을 노래한 시 모음



가을 편지

-고정희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가을 잎

- 도종환


가을 가고 찬 바람 불어 하늘도 얼고
온 숲의 나무란 나무들 다 추위에 결박당해
하얗게 눈을 쓰고 발만 동동 고르고 있을 때도
자세히 그 숲을 들여다보면
차마 떨구지 못한 몇개의 가을잎 달고 선
나무가 있다 그 나무가 못 버린 나뭇잎처럼
사람들도 살면서 끝내 버리지 못하는
눈물겨운 기다림 같은 것 있다
겨울에도 겨우내 붙들고 선 그리움 같은 것 있다
아무도 푸른 잎으로 빛나던 시절을 기억해주지 않고
세상 계절도 이미 바뀌었으므로
지나간 일들을 당연히 잊었으리라 믿는 동안에도
푸르른 날들은 생의 마지막이 가기 전 꼭 다시 온다고
죽은 줄 알았던 가지에 잎이 돋고 꽃 피고
설령 그 꽃 다시 진다 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살아 있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 생도 짙어져간다는 것을
믿는 나무들이 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내내 버리지 못하는 아픈 희망
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푸르른 그리움과 발 끝 저리게 하는 기다림을







가을

-김용택


산그늘 내린 메밀밭에 희고 서늘한 메밀꽃이라든가
그 윗 밭에 키가 큰 수수 모가지라든가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깊은 산 속 논두렁에 새하얀 억새꽃이라든가
논두렁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노랗게 고개 숙인 벼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농부와 그이 논이라든가
우북하게 풀 우거진 길섶에 붉은 물봉숭아 꽃 고마리 꽃 그 꽃 속에
피어 있는 서늘한 구절초 꽃 몇 송이라든가
가방 메고 타박타박 혼자 걸어서 집에 가는 빈 들길의 아이라든가
아무런 할말이 생각나지 않는 높고 푸른 하늘 한쪽에 나타난 석양빛이라든가
하얗게 저녁 연기 따라 하늘로 사라지는
저물 대로 다 저문 길이라든가
한참을 숨가쁘게 지저귀다가 금세 그치는 한수 형님네 집 뒤안 감나무가 있는
대밭에 참새들이라든가
마을 뒷산 저쪽 끄트머리쯤에 깨끗하게 벌초된
나는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들의 고요한 무덤들이라든가


다 헤아릴 수 없이 그리웁고
'다 헤아릴 수 없이 정다운
우리나라의 가을입니다







가을 엽서

- 이해인



1
하늘이 맑으니 바람도 맑고
내 마음도 맑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으로 잘 익은
그대의 목소리가 노래로 펼쳐지고
들꽃으로 피어나는 가을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물들어 떨어질 때마다
그대를 향한 나의 그리움도
한 잎 두 잎 익어서 떨어집니다

2
사랑하는 이여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어서 조용히 웃으며 걸어오십시오
낙엽 빛깔 닮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우리, 사랑의 첫 마음을 향기롭게 피워올려요
쓴맛도 달게 변한 우리 사랑을 자축해요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힘들고 고달팠어도 함께 고마워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조금은 불안해도
새롭게 기뻐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 없이
서늘한 가을바람
가을하늘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해요






가을

-강은교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 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가을 편지

- 고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 편지

- 이해인


초록의 바다 위에
엎질러 놓은
저 황홀한 불빛의
세례성사

솔숲 사이로 빛나는
한 그루 단풍나무처럼
그대는 내 앞에 계십니다

푸름 속에 혼자 붉어
가을 내내
눈길을 주게 되는
단풍나무 한 그루처럼

나도 자꾸
그대를 향해 있는
눈부신 가을 오후






가을 햇볕

-안도현


가을 햇볕 한마당 고추 말리는 마을 지나가면
가슴이 뛴다
아가야
저렇듯 맵게 살아야 한다
호호 눈물 빠지며 밥 비벼먹는
고추장도 되고
그럴 때 속을 달래는 찬물의 빛나는
사랑도 되고







가을 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가을 저녁

- 도종환


기러기 두 마리 날아가는 하늘 아래

들국화는 서리서리 감고 안고 피었는데

사랑은 아직도 우리에게 아픔이구나

바람만 머리체에 붐비는 가을 저녁.








가을비 내리는 날

- 허영자


하늘이 이다지
서럽게 우는 날엔
들녘도 언덕도 울음 동무하여
어깨 추스리며 흐느끼고 있겠지
성근 잎새 벌레 먹어
차거이 젖는 옆에
익은 열매 두엇 그냥 남아서
작별의 인사말 늦추고 있겠지

지난 봄 지난 여름
떠나버린 그이도
혼절하여 쓰러지는 꽃잎의 아픔
소스라쳐 헤아리며 헤아리겠지







가을에는

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 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 놓은, 뭉게 구름도 아니다
양떼 구름도 새털 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 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 온다
뭉게 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
엉금 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가을에 읽는 시

- 김용택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 밤에
달빛을 밟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 나가보았느냐
세상은 잠이 들고
지푸라기들만
찬 서리에 반짝이는
적막한 들판에
아득히 서보았느냐
달빛 아래 산들은
빚진 아버지처럼
까맣게 앉아 있고
저 멀리 강물이 반짝인다
까만 산속
집들은 보이지 않고
담뱃불처럼
불빛만 깜박인다
이 세상엔 달빛뿐인
가을 밤에
모든걸 다 잃어버린
들판이 가득 흐느껴
달빛으로 제 가슴을 적시는
우리나라 서러운 가을들판을
너는 보았느냐






가을꽃

- 정호승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 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







가을산

- 마종기


내가 옛날에 바람의 몸으로
세상을 종횡으로 누빌 때
높고 낮은 것도 가리지 않고
치고 안고 뒹굴고 다닐 때
산은 자꾸 내게서 눈을 돌렸지

이제 들리지 않던 소리 새로 들리고
소리들 모여 사는 낮은 산에 싸여
한평생의 저녁은 이렇게 오던가
푸른 구름의 너그러운 나그네 말이 없고
그 백수의 풍경만 나를 채우네

오, 가을 산에 모인 빛,
죽은 나뭇잎의 찬란한 색깔,
그 영혼의 색깔,
숨어살던 내 바람까지
오색의 춤판이 되어 돌아오네.







가을, 매미 생각

- 안도현


허공을 부여잡고 내내 울어대던 매미 소리 뚝, 그치자
바람 서늘해지고
매미가 붙어 있던 자리에
동그란 구멍이 생겼다
그 소란스럽던 햇볕도 꽤나 진지해져서
콩 꼬투리 속으로 들어간 놈은 때글때글해지고
수수밭머리에 내리던 놈은 턱 괴고 고개 숙일 줄도 안다
매미는
울기 위해
지금, 울지 않는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매미의 시절이 갔노라고
섣불리 엽서에다 쓰지 말 일이다
몸 속에는 늘 꼼지락거리며 숨쉬는 게 있는데
죽어도 죽지 않는
그게, 바로 흔히들 마음이라고 부르는 거란다
2007-09-02 09:5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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