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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고 싶은 글

  안개낀 가을아침에 읽는 시
  이정숙
  

시월/이 시 영



나비가 지나간 하늘 한복판이 북처럼 길게 찢겨졌다. 그곳막?구름 송이들이 송사리처럼 모여들어 엉덩방아들을 찧느라고 가을 한 자락이 오후 내내 눈부시다.








만년필/송 찬 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 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 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 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가을 노래/이해인





하늘은 높아가고
마음은 깊어가네

꽃이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여오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 싶고
죄없이 눈이 맑았든
어린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 나의 사이에도
말 보다 소리없이 강이 흐르네.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 져야겠구나

남은 시간을 아껴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잎이 질때마다
한 웅큼의 시(詩)들을 쏟아 내는
나무여, 바람이여,

영원을 향한 그리움에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가고
기도는 길어가네.





生 / 이시영


찬 여울목을 은빛 피라미떼 새끼들이 분주히 거슬러 오르
고 있다
자세히 보니 등에 아픈 반점들이
찍혀 있다.

겨울처럼 짙푸른 오후.





또 기다리는 편지 / 정호승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람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가을바람 / 최영미


가을바람은 그냥 스쳐가지 않는다
밤별들을 못 견디게 빛나게 하고
가난한 연인들 발걸음을 재촉하더니
헤매는 거리의 비명과 한숨을 몰고 와
어느 썰렁한 자취방에 슬며시 내려앉는다
그리고 생각나게 한다
지난 여름을, 덧없이 보낸 밤들을
못 한 말들과 망설였던 이유들을
성은 없고 이름만 남은 사람들을.....
낡은 앨범 먼지를 헤치고 까마득한 사연들이 튀어나온다

가을바람 소리는 속절없는 세월에 감금된 이의
벗이 되었다 연인이 되었다
안주가 되었다

가을바람은 재난이다




준다는 것/안도현



이 지상에서 우리가 가진 것이
빈 손밖에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서로 바라보는 동안은
나 무엇 하나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대 손등 위에 처음으로
떨리는 내 손을 포개어 얹은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스스럼없이 준다는 것
그것은
빼앗는 것보다 괴롭고 힘든 일입니다



이 지상에서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
그것은
세상 전체를 소유하는 것보다
부끄럽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대여
가진것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줄 것이 없어
마음 아파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누구에게 준
넉넉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찬비 내리고/나희덕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메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메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저녁 강에서 / 김해화


앞길이 캄캄한 노동판에서
두 눈에 불을 켜고
열두 시간
땀에 절은 노동을 끝마친 뒤
작업복 주머니에 소주 한 병을 찔러 넣고
투망을 멘 친구와 저물어 가는 강으로 간다.

피래미 몇마리
모래무지, 왕등어, 은어 몇마리들
국민학교 적 짝이었던 가시내의 이름이 걸려 올라오고
공사판 흙먼지 속에서 찌들어 버린 꿈
티없이 맑았던 어릴 적 그 꿈이 걸려 올라오고
몇 날 몇 밤을
죽음 같은 취기 속으로 가라앉아 캄캄하게 헤매이던
쓰라린 이별의 추억이 걸려 올라오고

감당할 수 없이 무거운 투망을 걷어 두고
아직 한낮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자갈밭에 앉아
우리들 가난한 술잔을 나눈다.
피래미를 씹으며
모래무지, 은어들의 퍼득이는 삶
퍼득이는 꿈과 사랑과 이별의 추억을 씹으며
쓰디쓴 노동의 삶을 마신다.
2006-09-20 07: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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