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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고 싶은 글

  가을 날 아침, 시와 더불어
  이정숙
  

그리운 나의 신발들

-신경림



50킬로도 채 안 되는 왜소한 체구를 싣고
꽤나 돌아다녔다, 나의 신발들.
낯선 곳 낯익은 곳, 자갈길 진흙길 가리지 않고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하면서도 그것들이 닳고 해지면 나는 주저 않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 내다버렸다. 그 덕에
세상사는 문리를 터득했다 고마워하면서.

이제 와서 내다버린 그 신발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세상사는 문리를 터득한 것은 내가 아니고 그
신발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 신발들에 실려 다니기 이전보다
지금 나는 세상이 온통 더 아득하기만 하니까.
그래서 폐기물 처리장을 찾아가 어정거리는 것인데,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내 헌 신발들과 함께
버려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사는 문리를 터득하고자 나섰던 꿈과 더불어!





밤 편지

-곽 재구


늦은 밤
구례구역 앞을 흐르는
섬진강변을 걸었습니다
착한 산마을들이
소울음빛 꿈을 꾸는 동안
지리산 능선을 걸어 내려온 별들이
하동으로 가는 물길위에
제 몸을 눕혔습니다
오랫동안
세상은 사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억압과 고통 또한 어두운 밤길과 같아서
날이 새면 봉숭아꽃 피는 마을
만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 아직 스무 살 첫 입맞춤의 추억
잊지 않았습니다
폭염 아래 맨발로 걷고 또 걸어
눈부신 바다에 이르렀을 때
무릎 꺾고 뜨겁게 껴안은
당신의 숨소리 잊지 않았습니다





기억한다, 그러나

-나희덕


기억한다
벼랑 위에서 풀을 뜯던 말의 목선을
그러나 알지 못한다
왜 그토록 머리를 깊게 숙여야 했는가를
벼랑을 기어오르는 사나운 해풍이
왜 풀을 뜯고 있는 말의 갈기를 흔들었는가를
서럭서럭 풀 뜯던 소리,
그때마다 바다는 더 시퍼렇게 일렁였는데
왜 나는 그게 울음이라고 생각했는지
끈은 보이지 않았지만
왜 나는 말이 묶여 있다고 생각했는지

기억한다
한없이 평화로웠던 말의 눈동자를
그러나 알지 못한다
눈동자에 비친 풀이 왜 말의 입 속에서 짓이겨져야 했는지를




노숙
-김사인


몸이 있으나 몸을 부려둘 공간이 없다 그들에게는
소비할 공간이 없다 먹고 죽을 공간도 없다 그러니
어떻게 발을 두나 머리를 두나 먹을 입과 담아둘 위장과 배설할
항문을 어디에 두나 똥은
또 어디에 내려놓나
모든 가능 공간을 몰수당했으므로 그들은
존재일 수 없음
그러므로 그들의 시간도 꽃필 수 없음 나프탈린처럼
또는 유령처럼 생으로 졸아들다가 증발한다
그러니 그들의 시간도 튀긴 구정물처럼 길가 담벼락이나
애꿎은 바지자락 같은 곳에 묻어 오갈들 뿐
그 떳떳하던 공간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들은 정말로
그 싱싱한 공간들을 다 먹어치운 것인가 소문처럼
그 착한 공간들을 어디에다 똥 눠 치운 것인가
(그렇다면 마지막에 그것을 한입에 물고 간 건 뉘 집 개?)
마이너스 공간에서 反物質을 소비하며 그들은 있다
아닌 공간의 그들을 긴 공간에서 보면
없다, 떼먹은 공간을 변제하고 그들은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현재는 오직 게워냄에 있다 제 안을 밖으로
뒤집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게운다 제 목구멍을 제 내장을 제 항문을 항문 바
깥의 우수마발 장삼이사를 돗진갯진을 피눈물을 살육을 마지막으로
게우는 제 입까지를 게운다
구강에서 항문까지 속통의 안팎이 홀딱 뒤집힌 채
그들은 있다, 있음인 체 해본다 한사코
그들은 별의 완성이자 죽음인 블랙홀이다 모든 공간은 몰수되고

우리는 그들의 내장 위에 붙어 있다
우리는 그들이 게워낸 공간 안에 다시 게워져 있다
우리는 그들의 항문을 지나 그 다음에 있다




마지막 가을

-정진규


여름을 여름답게 들끓게 하지도 못하고 서둘러 가을이 왔다 모든 귀뚜라미들의 기인 더듬이가 밤새도록 짚은 울음으로도 울음으로도 가 닿지 못한 어디가 따로이 있다는 게냐 사랑으로 멍든 자죽도 없이 맞이하는 가을의 맨살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이른 새벽길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바닷가 민박집 여자의 아침상도 오늘로 접어야 하리 늘 비가 내렸다 햇살들의 손톱 사이에 낀 푸른 곰팡이들이 아직도 축축하다 부끄럽다 이 손으로 따뜻한 네 손을 잡겠다 할 수는 없구나 딸이 늦은 시집을 간다는 편지를 객지에서 받는다 노동의 지전을 센다 마지막 그물을 거두었다 이러는 게 아니지 너무 오래 혼자 있는 가을에 익숙해졌다 서둘어 돌아가야 하리 왜 이토록 서성거리는 게냐 슬픔이 떠난 자리는 늘 불안했다 낡은 입성으로 오는 마지막 가을




느티나무 여자

-안 도 현


평생 동안 쌔빠지게 땅에 머리를 처박고 사느라
자기 자신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가을 날, 잎을 떨어뜨리는 곳까지가
삶의 면적인 줄 아는
저 느티나무

두 팔과 두 다리로 허공을 헤집다가
자기 시간을 다 써 버렸다
그래도 햇빛이며 바람이며 새들이 놀다 갈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다고, 괜찮다고,
애써 성성한 가지와 잎사귀를 흔들어 보이는

허리가 가슴둘레보다 굵으며
관광버스 타고 내장산 한 번 다녀오지 않은
저 다소곳한 늙은 여자

저 늙은 여자도
딱 한 번 뒤집혀보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
땅에 박힌 머리채를 송두리째 들어올린 뒤에,
최대한 길게 다리를 쭉 뻗고 누운 다음,
아랫도리를 내주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

그걸 간밤의 태풍 탓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인생을 절반도 모르는 자의
서툴고 한심한 표현일 뿐





어떤 날
-도 종 환


어떤 날은 아무 걱정도 없이
풍경소리를 듣고 있었으면
바람이 그칠 때까지
듣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집착을 버리듯 근심도 버리고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나뭇잎을 다 만나고 올 때까지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소쩍새 소리를
천천히 가지고 되오는 동안 밤도 오고
별 하나 손에 닿는 대로 따다가
옷섶으로 닦고 또 닦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나뭇잎처럼 즈믄 번뇌의
나무에서 떠나
억겁의 강물 위를
소리없이 누워 흘러갔으면
무념무상 흘러갔으면
2006-09-05 07:4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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