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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고 싶은 글

  구월도 깊어가는데
  이정숙
  

세족례

- 구중서 -


냇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어라
그 물이 흐리면 발이나 씻어라
그 누가 물을 가리켜 가려서 말했던가

최후의 만찬에서 대야에 물을 떠서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었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주고 있다니

북한산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물가에 앉은 내게 그 무슨 뜻으로
흐르는 물살이 굳이 내 발을 씻어주네





씨앗을 뿌리며

- 김 인 호 -



오랜 비 끝에 촉촉한 땅을 갈아 씨앗을 뿌린다

잘 묻히지 못한 씨앗도 너무 깊이 묻힌 씨앗도
싹을 내지 못한다던
어머니의 오랜 말씀을 떠올리며
서투르게 씨앗을 묻다가
나도 하나의 씨앗으로 묻히고 싶어졌다

묻혀
메마른 껍질을 벗어버리고
싹을 틔워 내서는 세상 고통과 억압의
모진 바람 맞서서 푸른 깃발 휘날리는

참으로 빛나는 사람들 밥상에 놓인
싱싱한 풋고추로, 조선상추로, 물기를 반짝이며
된장 고추장에 찍혀 질끈 씹히는
그런 날을 위해 오늘

나도 하나의 씨앗으로 어둔 땅에 나를 묻는다.





그렇게 속삭이다가
- 이성복 -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나이테

- 박 철 -


둥근 해가 종일 거리를 돌며
둥글게 둥글게 줄을 긋고 있었다
당신도 하루를 살았느냐고
당신도 뜨겁게 타올랐냐고
공원 벤치 몫 좋은 자리에
두 젊은 남녀가 나란히 앉아
고개를 숙이고 손전화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오늘 하루도 붉게 타오른다고
둥근 해가 애써 한 바퀴를 돌 무렵
찔레꽃 등진 벤치 끝에서
행색이 다른 두 노인이 싸우고 있었다
둥글게 둥글게 줄을 긋느라고
기력이 쇠했는지 능수버들 손으로
서로의 가슴을 치고 있었다
왜 이리 늦었느냐고
왜 이제 돌아왔느냐고





돌아오는 길

- 나태주 -


점심 모임을 갖고 돌아오면서
짬짬이 시간
돌아오는 길에 들러본 집이 좋았고
만난 사람은 더 좋았다

혼자서 오래 산 사람
오래 살았지만 외로움을 잘 챙겼고
그러므로 따뜻함을 잃지 않은 사람
마주 앉아 마신 향기로운 차가 좋았고
서로 웃으며 나눈 이야기는 더욱 좋았다

우리네 일생도 그렇게
끝자락이 더 좋았다고 향기로웠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샛강

- 고 은 -


누구는 그냥 샛강이라고 불렀다
누구는 벙어리 강이라고 불렀다
누구는 초승달 서른 개나 묻힌 강이라고 불렀다
누구는 어린 시절
이쁜 정순이 넋 떠내려간 강이라고 불렀다
이름이 많은 강이었다
그리움이 많은 강이었다





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 나희덕 -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막다른 기슭에서라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무언가 끝나가고 있다고 느낄 때
산이나 개울이나 강이나 밭이나 수풀이나 섬에
다른 물과 흙이 섞여 들기 시작할 때

당신은
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발을 멈추고 구름에게라도 물었어야 했다
산을 내려오고 있는 산에게
길을 잃고 머뭇거리는 길에게 물었어야 했다

파도에 몸이 무작정 젖어드는 그곳을
우리는 기슭이라고 부르지

산이나 짐승과 마주치곤 하는 산기슭
포클레인이 모래를 퍼 올리고 있는 강기슭
풀벌레 날아다니는 수풀기슭
기슭이라는 말에는 물기나 소리 같은 게 맺혀 있어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생겨난 비탈 끝에는
어떤 기슭이 기다리고 있는지

빛이 더 이상 빛을 비추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마지막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그래도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모든 무서움의 시작 앞에 눈을 감지는 말았어야 했다





쌀 석 섬

- 안상학 -


권정생 선생은 평소 자신의 몸 상태를
멀쩡한 사람이 쌀 석 섬 지고 있는 것 같다 했다
개구리 짐 받듯 살면서도
북녘에서 전쟁터에서 아프리카에서
굶주리는 사람들 짐 덜어주려 했다 그리했다
짐 진 사람 형상인 어질 仁
대웅보전 지고 있는 불영사 거북이
짐 진 자 불러 모은 예수
세상에는 짐을 대신 져주며 살았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삶은 하나같이 홀가분하다
2014-09-24 11:3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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