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유인도의 노래 | 소롯길 연가 | 함께 읽고 싶은 글 | 토방마루 | 방명록 | 콩 꼬투리


함께 읽고 싶은 글

  찬바람 매서운 겨울날의 시
  이정숙
  

겨울밤에 쓴 편지
-이원규


눈 쌓여 길이 사라지면
너 향한 새로운 발자국 하나
뚜렷이 새기는 줄 너 그렇게 알거라
기나긴 광산촌의 겨울밤
뼈만 허옇게 남아 그리움이 되는
겨울 강변 갈꽃들의 몸짓으로도
문득 자지러지는 별들의 비명으로도
끝내 이르지 못할
기막힌 겨울 편지를 쓰노니
너는 아느냐
마지막 반을 버리기 위해
오늘도 일찍 솟아오른 저 반달의 사연을
네 편지를 읽는 겨울밤
여기 산간지방엔 둥둥 소북을 울리며
송이송이 함박눈이 내리고
푸른 잠 푸른 꿈을 꾸는 청보리들의 아우성과
탱자나무 가시에 걸린 비비새의 깃털 하나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겨울밤
백화산을 넘어온 낯선 바람이
밤늦도록 불빛 새나가는 내 유일한 출구
다락방 유리창을 기웃거리는데
너는 아느냐
마저 남은 반을 찾기 위해
새벽에도 지지 않는 저 반달의 뜻을
창문이 흔들리며 네 잠을 깨우든지
바람이 문득 네 젖가슴을 스치면
그것은 겨울하늘 겨울밤도 울릴 수 있는
내 한숨인 줄 알거라
이윽고 멀리 새벽닭이 울거든
광산촌 하내리의 겨울밤
내 뜰에도 새벽이 가까운 줄 알고
달빛에 눈빛 더욱 빛나는 밤이면
나도 네 생각에 잠 못드는 줄
너 그렇게 알거라





기러기 울음
-김인호


近來 드물게 연사흘 차갑다.
...
물만 어는 게 아니었다.
금이 간 목숨들도 얼어 쩡쩡 소리를 내며 주저앉는다.

새파랗게 질린 하늘 붉게 물들이는 노을빛도 차갑다.

만경벌 에돌아 姜氏喪家 가는 길
쉬익쉬익 바람을 가르는 기러기떼 울음도 차갑다




첫 눈

-나종영


첫눈은...
언제나 눈부시게 온다

첫눈은 언제나 생각보다 조금은 늦게 온다
첫눈은 기다리면 오지 않고
그리움에 목마른 세상의 어깨 위에 온다

첫눈은 진눈깨비로 싸래기로 푸석푸석 애를 태우다가
온 마당가에 환하게 온다

첫눈은 먼 산 푸른 이마에 먼저 내린다
첫눈은 새벽 첫차를 기다리는
누이들의 머리 위에 내린다

첫눈은
해마다 술꾼들이 잠든 밤
첫눈의 새로운 모습으로 온다
참 눈부시게, 지그시 눈을 감고 온다





-박두규

...

늪에 태어나 늪이 되어 늪을 살았다. 몸부림칠수록 늪은 나를 조여 왔으나 반백이 되는 동안 나는 서서히 늪의 절망에 익숙해졌다. 차단된 어둠 속 혼자라는 절망이 유일한 휴식의 공간이기도 했다. 빠져드는 늪 부드러운 질감의 손끝으로 가까스로 전해오던 그대의 전언은 스펨으로 처리되고 늪을 빠져나가면 푸른 숲 바람과 햇살의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늪의 일상에 중독되면서도 어느 순간 그러한 스스로를 부정하기 시작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늪의 세상살이가 통째로 하나의 환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왜였을까. 세상의 죽음들이 퇴적되는 어둠 저편에 투명한 출구 하나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즈음인 것 같다. 이승의 세월을 다하기 전 저 출구에 이를 수 있을까. 문 밖에 이승의 시간이 처음처럼 다시 흐른다는 그대의 전언은 사실일까. 나는 아직도 늪이다.




석류
-나희덕


석류 몇 알을 두고도 열 엄두를 못 내었다

뒤늦게 석류를 쪼갠다
도무지 열리지 않는 門처럼
앙다문 이빨로 꽉 찬,
핏 빛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네 마음과도 같은
석류를

그 굳은 껍질을 벗기며
나는 보이지 않는 너를 향해 중얼거린다

입을 열어봐
내 입속의 말을 줄게
새의 혀처럼 보이지 않는 말을
그러니 입을 열어봐
조금은 쓰기도 하고 붉기도 한 너의 울음이
내 혀를 적시도록

뒤늦게,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게





단정학 앞에 서서
-정희성


언젠가 고양시에서 강연이 있던 날
좀 일찍 와서 산책이나 하자는
박철 시인과 호수공원을 거닐다가
외다리로 오래 서 있는 단정학을 보았다
우리나라 논밭 드넓은 하늘을 날던
이 새를 이제 십장생도에서나 볼 수 있는데
그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우리라고 제법 크게는 지어놓았지만
그 큰 새가 날기에는 너무 좁아 보였다
중원의 넓은 들을 날던 새가 여기 와서
십년 넘게 날갯짓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외다리로 서서 먼 하늘만 바라보았을 터이다
그 새를 보지 않았어야 했다
팔을 들어보았지만 날아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박철 시인이 외다리로 오래
서 있는 그 단정학 앞에 나를 세워둔 것은
남모를 무슨 뜻이 있었을 성싶다
그는 짝 잃은 저 외로운 단정학에 관해
한편의 시를 쓴 적이 있다고 했다
그걸 아직 읽어본 적이 없지만
얼핏 미당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 시의 이마에도 몇방울의 피가
맺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학의 정수리에 얹힌 붉은 점을 오래오래
바라보고 바라보며 한쪽 다리를
슬며시 들어올리는 시늉을 해보았다




때 묻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이은봉


늦은 밤이다 서둘러 때 묻은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베개는 아내의 젖가슴처럼 뭉클하다

낮 동안 들뜬 가슴, 밤 깊어도 가라앉지 않는다 귓속에서 심장 뛰는 소리 끊이지 않는다

아내의 허벅지처럼 푸근한 베개라니!

혼자서 잠 청한 지 벌써 몇 해인가 괜한 질문하지 않기로 한다

질문해 무엇하랴 아직도 한 줌 양식 찾아 객지를 떠돌며 살고 있거늘!

낮 동안 움츠러든 마음, 쉽게 펴지지 않는다 창밖 환해지도록 눈망울 벌겋게 붓는다.
2013-12-21 12:46:37



   

관리자로그인~~ 전체 87개 - 현재 1/5 쪽
번호
제목
이름
파일
날짜
조회
238
이정숙
2016-01-30
315
237
이정숙
2014-09-24
545
이정숙
2013-12-21
810
235
이정숙
2013-08-30
1169
234
이정숙
2011-10-28
1450
233
이정숙
2010-07-08
1755
232
이정숙
2010-01-11
1658
231
이정숙
2009-07-03
1743
230
이정숙
2008-09-23
2267
229
이정숙
2008-05-23
2039
228
이정숙
2008-02-17
2173
227
이정숙
2007-12-17
1933
226
이정숙
2007-09-02
2042
225
이정숙
2007-02-11
3645
224
이정숙
2007-01-01
2733
223
이정숙
2006-12-24
2226
222
이정숙
2006-11-28
2206
221
이정숙
2006-09-20
2253
220
이정숙
2006-09-05
2242
219
이정숙
2006-06-22
2355

[맨처음] .. [이전] 1 [2] [3] [4] [5] [다음] .. [마지막]



> HOME 유인도의 노래 | 소롯길 연가 | 함께 읽고 싶은 글 | 토방마루 | 방명록 | 콩 꼬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