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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고 싶은 글

  바람, 그 서늘한 유혹
  이정숙
  

헛되이 나는

-조용미


헛되이 나는 너의 얼굴을 보려 수많은 생을 헤매었다
거듭 태어나 너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다

위미리 동백 보러 가 아픈 몸 그러안고서도, 큰 엉해안이나 말리오름에서도, 빙하기 순록과 황곰 뼈의 화석이 나온 빌레못동굴 앞에까지 와서도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저 멀구슬나무나 담팔수, 먼나무가 당신과 아무 상관없다고 확신할 수 없는 이 생이다
너에게 너무 가까이도 멀리도 가지 않으려고

헛되이 나는, 이 먼 곳까지 왔다




한 톨의 감자라는 시간 속에서

-고형렬


누구인가, 다가와 냄새를 맡더니 갉아먹는다
대개 반대파의 어떤 유전자는 끔찍해하지만
곧이어 시원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씨가 이렇게 크게 자라는 건 가려움증이다
그는 눈부터 갉아먹어치웠다
눈이 과자처럼 부서졌다, 물기와 함께
나의 귀는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윽고 귀가 사라졌다, 도처에 박혀 있던
저 밖의 번잡한 도시는 상상도 기억도 못할 일

감자의 아름다움과 애틋함을 느꼈다
현재 감자의 높은 소멸의 경지를 비록 모를지라도
감자의 다이아몬드로 사각거렸다
한 톨의 감자는 사라졌고, 누군가 자리를 비우는 순간
언제 돌연 나타나 또 거기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부서져 없어졌다





가족

-강은교


그날, 그 젊은 여자는 무덤 위에 걸터앉아
둥근 젖통을 꺼냈다.
푸른 심줄이 군데군데 박혀 있는 둥근 그것.
지구의 같은 것
아기가 종처럼 지구의에 매달렸다.
종추가 종벽에 부딪쳐
눈부시게 둥그렇게 오물거렸다




하현

-도종환


반쪽 달빛으로도 뜰이 환하다
산딸나무 흰 잎이 달빛으로 더욱 희게 빛나서
산짐승들 길 찾기 어렵지 않겠다
중국에서 왔다는 발효차 달여 마시며
고적(孤寂)의 뒤를 따라오는 호젓함을 바라본다
숲의 새들도 고요의 죽지에 몸을 묻고
입술을 닫은 한밤중
잔별 몇 개 따라 나와
밤의 한 귀퉁이 조금 더 윤이 나는데
남은 몇 모금의 환한 시간을 아껴 마시며
반쯤 저문 달 바라본다

저물 날만 남았어도 환하다는 것이 고맙다




세한도(歲寒圖)

-송수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가지끝 위로 치솟으며 몸놀림하는 까치 한 쌍
이 여백에서 폭발하는 울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고목나무 가지끝 위에 까치집 하나
더 먼 저승의 하늘에서 폭발하는 울음……




그런 이유

-김선우


그 걸인을 위해 몇장의 지폐를 남긴 것은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닙니다

하필 빵집 앞에서
따뜻한 방을 옆구리에 끼고 나오던 그 순간
건물 주인에게 쫓겨나 3미터쯤 떨어진 담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그를 내 눈이 보았기 때문

어느 생엔가 하필 빵집 앞에서 쫓겨나며
드넓은 얼음장에 박힌 피 한방울처럼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이 적막했던 것만 같고-

이 돈을 그에게 전해주길 바랍니다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잘 기억하기 때문

그러니 이 돈은 그에게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나에게 어쩌면 미래의 당신에게
얼마 안되는 이 돈을 잘 전해주시길




신발이 나를 신고

-이재무


주어인 신발이 목적어인 나를 신고

직장에 가고 극장에 가고 술집에 가고 애인을 만나고
은행에 가고 학교에 가고 집안 대소사에 가고 동사무소에 가고
지하철 타고 내리고 버스 타고 내리고

현관에서 출발하여 현관으로 돌아오는 길
종일 끌고 다니며 날마다 닳아지는 살[肉]
끙끙, 봉지처럼 볼록해진 하루
힘겹게 벗어놓고
아무렇게나 구겨져 침구도 없이 안면에 든다




초록의 힘

-이기철


낙하의 곧고 빠른 힘은 나무의 직립 때문이다
비라고 부르면 입 안 가득 고이는 빗물
나무라고 부르면 환히 귀가 트이는 나무들
구를 때마다 지구를 뭉치는 힘은 초록으로 솟구친다
나무의 언어 속에 들어가면
사람의 언어는 사라지고 나무의 언어만 남는다
발이 시려도 신 신지 않은 나무
오래 비장해 두었던 초록의 힘
낮은 데서 신생을 준비하는 나무들
그 잎을 적시는 곧고 우아한 빗줄기들
비 그치면 흰 타월로 걸릴 햇볕 폭포들
2013-08-30 09:3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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