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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고 싶은 글

  매미우는 오후에 읽는 시
  이정숙
  

잠시 빌려 사는 세상의 집들이 너무 크지 않느냐

-김용택

어여쁘게 물든다
빨갛게 물든다
어여쁘게 물든다
노랗게 물든다
빨갛게나 더 두지
노랗게나 더 두지
어여쁘게 그냥 두지
가을 산
아. 가을 산이 간다


안개비가 내린다
잎 다 진 가을 나무들이 안개 속에 서서 젖는다. 화사한
봄날 이슬비에 촉촉하게 젖어 날마다 새롭던 잎. 씻어낼
수 없는 죄는 화려하다. 저 단풍들 좀 보거라. 소리도 없
는 안개비에 속살이 젖어 살아나는 화려한 색깔들을 좀 보
거라.
사람들이 시집을 보낸다. 이 멀고 먼 강가까지. 아이들
이 떠드는 소리 안개 속에서 아득하다. 그들의 시와 사랑.
그들의 고뇌와 외로움. 그리고 그들이 걸어온 흔적들과 남
아 있는 아득한 길. 삶은 때로 아득하니까. 때로 화려하게
물들고 싶은 우리들의 남루한 사랑. 한 편의 시로 한 채의
집을 지으려는 시인들의 애타는 몸짓들이 아슬아슬하지만
가을에 집이 그리 쉬운가.
감이 익는다.
아이들이 이파리 하나 없는 감나무를 그리고 감나무 아
래 허술한 집 한 채를 짓고. 이 동네 저 동네 이 집 저 집
감나무 감이 익는다고 시를 쓴다. 꽃이 핀다. 노란 산국들
이 마구잡이로 피어난다. 운동장 가 벚나무는 붉은 옷을
다 벗는데. 그 나무 사이로 우체부가 빨간 오토바이에 '시
의 집'을 싣고 온다. 좀체로 사람들이 들어가 살 수 없는
그 집. 집 안에서는 너무 덥고. 집 밖에서 눈도 없이 바람
만 불고 너무 춥다. 보아라. 잠시 놀러 와서 빌려 사는 세
상의 집들이 내가 살기엔 너무 크지 않느냐.


안개 속에서 돌아온 산하고 놀고 싶다.
안개 속에 가만히 서 있는 나무 아래 서서 나무를 바라
보며 나무야. 나무야, 나랑 놀자. 잎 다 진 나무하고 놀고
싶다.


이슬비가 내린다.
산은 나무의 집이다. 나무로 산의 집을 짓는다. 산은 나
무를 데리고 어디로 갔다가 오는 걸까. 안개. 안개가 하얗
게 다가오는데. 아이들이 도화지에 감나무를 그린다. 아이
들은 안개 속에서 무엇이든지 다 그들 세상으로 데려온다.
감나무 검은 가지에 붉은 감들이 파란 허공에 그려진다.
허공만이 진실일까. 아무도 따지 않은 감들이 아이들 그림
속으로 도망가 붉고 둥글게 금방금방 그려진다. 그 그림
속 산 아래 강 언덕 감나무가 있는 집으로 나도 들어가 문
을 닫는다.


집을 두고
산은 간다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사랑을 가진 사람들은 가을 강으
로 가고 싶으리라
가을에 물들지 않는 사랑은 있는가
가을에 지지 않는 사랑이 있는가
노랗게 단풍 물든 지리산 물푸레 나뭇잎같이 밟히는 선
명한 사랑. 아, 선명한 사랑.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감출 수 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들
은 산을 내려와 강으로 가고 싶으리라
강물은 흐르고
산은 천천히 강에 내린다
가을비로도
씻어낼 수 없는 화려한 무늬를 가진 사랑은 지고 말리
라.


어여쁘게 더 두지
빨갛게나 더 두지
노랗게나 더 두지


산이 간다.





겨울 풍경

-박남준

겨울 햇볕 좋은 날 놀러가고
사람들 찾아오고
겨우 해가 드는가
밀린 빨래를 한다 금세 날이 꾸무럭거린다
내미는 해 노루꽁지만하다
소한대한 추위 지나갔다지만
빨래 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쩍 버썩 뼈를 곧추세운다
세상에 뼈 없는 것들이 어디 있으랴
얼었다 녹았다 겨울 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 그러하리
언젠가는 저 겨울빨래처럼 뼈를 세우기도 풀리어 날리다가
언 몸의 세상을 감싸주는 따뜻한 품안이 되기도 하리라
처마 끝 양철지붕 골마다 고드름이 반짝인다
지난 늦가을 잘 여물고 그중 실하게 생긴
늙은 호박들 이 집 저 집 드리고 나머지
자투리들 슬슬 유통기한을 알린다
여기저기 짓물러간다
내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한다 호박을 자른다
보글보글 호박죽 익어간다
늙은 사내 하나 산골에 앉아 호박죽을 끓인다
문 밖은 여전히 또 눈보라
처마 끝 풍경소리 나 여기 바람 부는 문밖 매달려 있다고,
징징거린다


두더지도 살고 참깨도 사는 길
고재종

텃밭에 참깨씨를 뿌려놨더니
참깨순 쑥쑥 오른다, 오르는데
요런 요망한 두더지들이
땅 밑으로 이 길 저 길 내는 통에
참깨순 다 죽는다, 다 죽어선
어디 한번 해보자, 전쟁을 선포하고
그놈들 잡겠다고 골머리를 싸매지만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더더욱 낮만 아니고 밤에도 길을 내니
요령부득이다, 요령부득인데
옆집의 쭈그렁 꼬부랑 할머니
그놈들 지나가 흙 부푼 길목 길목에
대꼬챙이를 박아두란다, 박아두었더니
신기하게도 더는 길을 내지 않는다
하고 희한해서 이유를 여쭈니
그놈들은 눈이 어둡당께
주둥이만으로 길을 뚫는당께,
주둥이가 부딪치니 지가 워쩔 것이여!
그러나저러나, 그러면 그놈들은
이제 어디로 길을 낼 것인고 했더니
다 저 살 길을 뚫는당께,
저도 살고 참깨도 사는 길을 뚫는당께,
길을 뚫는다고 해서 다 길이 아니랑께!
그 말을 알아들은 듯 나보다 먼저
참깨순은 마냥 일렁이는 게 아닌가.


호박젓국

-장석주

어린 별 두엇 떠 있는 초저녁 하늘을 보며 마당을 건너
와 저녁밥을 짓는다. 그렇잖아도 뭘 먹을까, 하던 참에
태정이 어머니가 텃밭에서 딴 애호박 두 덩이를 갖고 어
둑어둑한 어둠 밟으며 내려온다. 애호박 썰어 참기름 두
른 냄비에 볶은 뒤, 마늘 한 숟갈, 새우젓 한 숟갈, 고춧
가루 약간, 물 한 컵 넣고 자작자작 물 졸아들 때까지 끓
인다. 날 궂어 창호지 바른 문짝에 싸락싸락 싸락눈 부
딪치는 초겨울 저녁나절 쌀뜨물 받아 새우젓 풀어 끓인
어머니의 호박젓국이 내 피를 만들고 뼈를 키웠다. 오늘
은 쌀뜨물 없으니 맹물로 끓인다. 흙냄새 향긋한 애호박
이 참기름 새우젓 속에 뒹굴며 제 속에 지그시 품고 있
던 진국을 기어이 토해낸다. 이 슴슴하고 따뜻한 호박젓
국을 뜨며 어머니를 생각한다. 열무김치 놓고 밥 한 공
기 뚝딱 해치우는 동안 밤하늘엔 집 나온 별들이 더 많
아졌다. 호박젓국은 씹을 틈도 없이 녹고, 입맛이 동해
밥 한 공기 더 뜨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는다. 다시 마당
에 나오니 슬하에 저녁마다 된똥 누는 말 안 들어 미운
일곱 살짜리 아들이라도 하나 두고 싶은 적요寂寥가 사
방에 꽉 차 있다. 어린 아들이라니! 숫국의 삶은 이미 멀
어져 버렸으니 그건 분수에 맞지 않다. 그저 새초롬한
앵두나무 두 그루와 어여쁜 시냇물 소리나 키우는 수밖
에 없다. 지금쯤 신흥사 저녁 예불 알리는 범종梵鐘운 뒤
설악산 화채봉 능선 위로는 보름 지난 달 둥두렷이 떠올
랐을 게다.



울타리

-이동순

사람에겐 원래
울타리란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울타리를 엄숙한 표정으로 세워 놓고
이곳에 없어선 안될 것처럼 생각한다
사람들의 마을 부근에서 살아가는
초목금수들도 이젠 이런 버릇에 길이 들었다
지난해 풍우에 무너진
뽕나무 울섶을 고쳐 세웠더니
참새 동박새 도르레미란 놈들이
장독간에 널어놓은 엿질금을 보고 몰려와서
곧장 그곳으로 앉질 않고
울바자 끄트러미에서 오래 주위를 살피다가
한순간에 후루룩 나려앉곤 한다
앉아서도 그저 초조하게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열이면 열 마리가 모두 그렇게 한다
괜시리 철조망 탱자가시 하다못해 노끈이라도 둘러쳐서
이쪽 저쪽을 갈라 놓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의 버릇 고약함이여



방을 얻다

-나희덕

담양이나 평창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는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돌아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서 일할 공간이 필요해서요.
나는 조심스럽게 한옥 쪽은 가리켰고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글씨, 아그들도 아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이씨 집안의 내력도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오.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위에 앉아 계신 저녁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세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그 부부는 알고 있을까,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이미 세들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꽃밭에 길을 묻다

-김선우

1

어젯밤 나의 수술대에는 한 아이가 올라왔습니다. 작고 노란
알약 같은 아이의 얼굴. 신경들이 싸늘한 슬픔으로 명랑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수술용 장갑을 끼었지요.

2

아이가 내 수술실을 노크한 건 지난봄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태백에 가는 길이었지요. 태백산 지천으로 만발한
철쭉꽃. 수혈 받으로 오라는 꽃들의 전갈을 받고 더러워진 내 피
를 버리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식당칸 열차에서 바람이 허공에
절벽을 만드는 걸 무료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사북을 지날 때
였어요. 버려진 폐광이 전족을 한 여자처럼 뒤뚱거리며 골짜기
사이로 곤두박질치는 길 끝에 회백색 슬레이트 지붕이 보였지요.
산벚꽃나무였던가요. 꽃그림자 소슬한 평상 위에서 한 소녀가 기
찻길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오도카니 모은 무릎, 기차를 바라보
며 소녀는 긴 머리채를 하염없이 빗질하고 있었지요.

그때 그 태백행. 노랗고 질긴 점액이 접시 끝에서 늙은 꽃술처
럼 떨어져내렸지요. 외로움과 공포를 한꺼번에 알아버린 어린 짐
승의 충혈된 눈이 천제단 붉은 철쭉 꽃잎 속에 웅크리고 있었습
니다. 오지 마. 오지 마. 꽃대궁을 분지르며 나는 소리쳤지요.

3

그 아일 다시 만난 건 올 여름입니다.
지독한 폭우의 끝. 여위고 남루한 것들이 먼저 휩쓸려 주저앉
고 유복한 성곽들은 더욱 당당해지더군요. 희망이라는 병病을 버
릴 수 없었으므로 가난한 아버지들의 삽질 소리는 멎지 못하고
범람한 하천에 깨진 유리구슬로 떠내려왔지요. 그 여름의 끝에서
그앨 본 겁니다. 널어놓은 이불호청 붉은 목단 꽃무늬가 작열하
던 담벼락 끝, 깨진 벽돌을 움켜쥔 아이가 금 간 담장 밑에 오도
카니 서 있었어요. 녹슨 자전거바퀴와 빈 라면상자가 길 잃은 염
소처럼 엎드려 있었구요. 햇빛이 바퀴살에 걸려 챙강거리며 울었
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합니다. 행인 몇이 병나발을
불며 지나갔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어요. 깨진 벽
돌조각을 꼭 움켜쥐고 하염없이 서 있을 뿐이었지요.

그때 그 사내아이 일렁이는 눈그림자. 사북을 지나며 본 소녀
의 얼굴임을 나는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얘야, 해바라기
를 보러 오지 않을래? 나는 아이에게 가만히 손을 내밀었지요. 원
한다면 내 수술실에 와도 좋아.

4

해바라기/긴 꽃대궁을/타고 오르는/ 잿빛 쥐
씨앗을 파먹힌/해바라기/슬픈/음부로
흘러드는/안개/젖빛 따뜻한/달의 피

안개 짙은 달밤. 씨앗을 파먹힌 해바라기를 통과해 어젯밤 그
아이가 내게 왔습니다. 아이의 긴 머리칼에서 달이 흘린 피냄새
가 났습니다.
나는 깨진 벽돌을 움켜쥔 아이를 안아 수술대에 눕혔지요.
나의 늑골 위에서. 고산식물처럼 고개를 외로 틀고 아이는 곧
잠들었습니다. 꽃그늘 일렁이는 아이의 가슴팍. 나는 조심스레
메스를 그었지요.

5

나의 아이는 무사합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수술이었어요. 산
벚꽃잎을 열자 철쭉이, 철쭉 꽃술을 열자 붉은 목단이 뭉클거리
며 피어올랐지요. 젖빛 따뜻한 달의 피가 아이의 심장으로 흐르
고, 나는 해바라기를 꺾어 잔인한 물살을 끌어당기며 폭죽처럼
씨앗을 쏘아올리더군요. 창밖엔 능소화, 염천炎天을 능멸하며 핀
다는 그 꽃이 제 꽃대궁 속에 두레박을 내려 길을 묻고 있었습니
다. 인장印章처럼 붉은 달이 태양의 뒤편에서 서늘하고 뜨겁게 차
오르는 밤이었습니다.
2010-07-08 11:5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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