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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고 싶은 글

  2010년 1월 11일 오후의 시
  이정숙
  

새해의 맑은 햇살하나가

-정호승


해뜨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새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갑니다
누님같은 소나무가 빙그레 웃는
새해의 아침이 밝아옵니다
맑은 연꽃대에 앉은 햇살 하나가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당신의 창을 두드리고
아무도 닦아주지 않는 당신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사랑하는 일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다시 길을 가게 합니다
어두운 골목
무서운 쓰레기통 옆에 쭈그리고 앉아
이제 더 이상 당신 혼자 떨지 않게 합니다
쓸쓸히 세상을 산책하고 돌아와 신발을 벗고
이제 더 이상 당신 홀로 밥을 먹지 않게 합니다
밝음의 어둠과
깨끗함의 더러움과
배부름의 배고픔과
편안함의 괴로움을 스스로 알게 합니다
때로는 마음의 장독대 위에 함박눈으로 내려
당신을 낮춤으로써 더욱 낮아지게 하고
당신을 낮아지게 함으로써 더욱 고요하게 합니다
당신이 아직 잠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나무와 숲을 구분하지 못하고
바람과 바람소리를 구분하지 못할지라도
새해의 맑은 햇살 하나가
천개의 차가운 강물에 물결지며 속삭입니다
돈을 낙엽처럼 보라고
밥을 적게 먹고 잠을 적게 자라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살아 있다고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내리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대신하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팽나무가 쓰러지셨다

-이재무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 쓰러지셨다
고집스럽게 생가를 지켜주던 이 입적하셨다
단 한 장의 수의, 만장, 서러운 곡도 없이
불로 가시고 흙으로 돌아, 가시었다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내부의 텅 빈 몸으로 보여주시던 당신
당신의 그늘 안에서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고
이웃마을 숙이를 기다렸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아이스께끼 장수가 다녀갔고
방물장수가 다녀갔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부은 발등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
우리 마을의 제일 두꺼운 그늘이 사라졌다
내 생애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김기택




비틀거리며 그는 밤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한순간 그는 나를 보았다.
그 눈동자는 이미 나를 투시하고
거리의 차들과 행인들을 넘어
세상의 허공과 무의식이 뒤범벅이 된 어느 곳을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엔 보이지 않는 어느 곳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어라고 그는 중얼거리고 있었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억양과 리듬은 있었으나
정작 발음 달린 단어와 문장은 그 말에 없었다.
이미 뭉개져 말의 형태가 없는데도
그 말에는 울음과 한탄 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가끔 밤 공기를 붙들고 후려치고 뒤흔들며
비명 같은 노래가 되기도 하였다.
말과 노래가 흔드는 대로
그의 가볍고 허름한 몸은 마음껏 비틀거리고 있었다.
취한 시간에만 보이는 그곳
취한 시간에만 나오는 그 말을
그러나 술이 깬 그는 결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눈부처

-김신용


그대 눈 속에 들어 있는 얼굴 하나
깊은 동굴 같은 얼굴 하나
슬픔이 石筍처럼 맺혀 자라나고 있는
그 돌고드름에 매달려 눈물처럼 그렁이고 있는 얼굴 하

젖은 나뭇잎 같은 그 위조지폐를, 지갑 속의 사진처럼 간
직하고 있는
지갑 속의 사진처럼 간직하고 있어
마치 강철로 만든 잎처럼, 아무리 바람 불어도 떨어지지
않는 얼굴 하나
하고 싶은 말들은 그 눈 속에 울타리처럼 두르고
너와집이라도 지어 살게 하고 싶은 것일까?
돌고드름에 맺힌 눈물을 삽처럼 쥐어주며
더 깊은 동굴을 파게 하고 싶은 듯, 눈꺼풀을 깜박이는
눈 속의 얼굴 하나
그 태초의 빛인 듯, 손에 쥔 삽으로
그대 눈 속에 어두운 洞穴을 경작하고 있는, 그 위조지폐
로 사는 건 슬픔뿐이지만
맺힌 돌고드름의 삽질로, 파헤쳐진 그대 가슴 속을 방으
로 꾸며주고 있는
눈이여, 그 동그란 눈동자 속의 囹圄여
한 줄기 슬픔에도 속절없이 무너져내릴 눈사람 같은
땀방울들, 맺히고 맺혀 이제 가시 기둥 같은 돌고드름이
되어 매달려 있어도
그대 눈 속에 비로소 얼굴이 되는 얼굴 하나
그대 눈 속에 비쳐 비로소 세계가 되는 얼굴 하나
2010-01-11 16:2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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