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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고 싶은 글

  주말 아침, 시를 읽다
  이정숙
  

그녀의 삶

- 신경림


광부의 아내가 되었을 게다,
낙반으로 허리를 다친 아버지를 닮은
광대뼈 불거진 사내의 아내가.
탄가루 시커먼 울타리에 호박 심고
강냉이 심고 고추 심고,
아들 낳고 딸 낳고.
삼십 촉 흐린 전등 아래서
남편의 떨어진 양말을 꿰매다가
문득 비벼보는 침침해진 눈.
더러는 남편을 따라나가
삼겹살에 소주도 한두 잔 기울이면서.
떠올려볼 게다, 별이 되어 가슴에 박힌
그림자처럼 스쳐간 사람들의 그림자를,
어떤 것은 잊고 어떤 것은 더 또렷하게,
기쁨도 나누고 슬픔도 나누면서.
호박잎 강냉이잎 고춧잎에
탄가루 날아와 앉는 사이
오 년이 가고 또 십 년이 가고,
아이들은 자라고 남편은 늙고.
어떤 별은 아예 사라지고 어떤 별은
더 크고 밝아지고 세월 따라.
아이들은 대처로 나가고
마침내 남편도 가슴속의 별이 되면서.
행복했을 게다, 아니 불행했을 게다,
긴 세월 뒤에 제 자란 주막 자리로 돌아와
제 어미처럼 쭈그리고 앉아서.
끝내는 스스로 제 가슴속의 별이 되면서.





겨울 산사에서

- 이 성 선


산이 깨어나는 시간에 일어나 앉아
시를 쓸까 좌선을 할까 차를 마실까
별빛 내려와 쓸고 돌아간 도량을 돌까
물소리 올라가 얼어붙은 고요한 하늘 위로
산이 깨어나는 소리 하나만 걸려 있다
이것저것 다 놓아두고 그냥 바라보며
눈 안에 그 모습 하나 고요히 앉혀두자





동백꽃을 줍다

- 이 원 규


이미 져버린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닌 줄 알았다

새야, 시든 꽃잎을 물고 우는 동박새야
네게도 몸서리치는 추억이 있느냐

보길도 부용마을에 와서
한겨울에 지는 동백꽃을 줍다가
나를 버린 얼굴
내가 버린 얼굴들을 보았다

숙아 철아 자야 국아 희야
철 지난 노래를 부르다 보면
하나 둘
꽃 속에 호얏불이 켜지는데
대체 누가 울어
꽃은 지고 또 지는 것이냐

이 세상의 누군가를 만날 때
꽃은 피어 새들을 부르고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 잊혀질 때
낙화의 겨울밤은 길고도 추웠다

잠시 지리산을 버리고
보길도의 동백꽃을 주우며,
예송리 바닷가의 젖은 갯돌로 구르며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지 않는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라는 것을

경아 혁아 화야 산아
시든 꽃을 물고 우는 동박새야
한번 헤어지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인줄 알았다





마음에 집이 없으면

- 정 호 승


마음에 집이 없으면
저승도 가지 못하지
저승에 간 사람들은 다들
마음에 집이 있었던 사람들이야

마음에 집이 없으면
사랑하는 애인도 데려다 재울 수 없지
잠잘 데 없어 떠도는 사람
잠 한 번 재워주지 못한 죄
그 대죄를 결코 면할 수 없지

마음에 집이 없으면
마당도 없고 꽃밭도 없지
꽃밭이 없으니 마음 속에
그 언제 무슨 꽃이 피었겠니

마음에 집이 없으면
풍경소리도 들을 수 없지
마음에 세운 절 하나 없어
아무도 모시지도 못하고
누가 찾아와 쉬지도 못하고

마음에 집이 없으면
결국 집에 가지 못하지
집에 못가면
저승에 계신 그리운 어머니도
뵙지 못하지





저 물결 하나

- 나 희 덕


한강 철교를 건너는 동안
잔물결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왔다
얼마 안 되는 보증금을 빼서 서울을 떠난 후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한강,
어제의 내가 그 강물에 뒤척이고 있었다
한 뼘쯤 솟았다 내려앉는 물결들,
서울에 사는 동안 내게 지분이 있었다면
저 물결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결, 일으켜
열 번이 넘게 이삿짐을 쌌고
물결, 일으켜
물새 같은 아이 둘을 업어 길렀다
사랑도 물결, 처럼
사소하게 일었다 스러지곤 했다
더는 걸을 수 없는 무릎을 일으켜 세운 것도
저 낮은 물결, 위에서였다
숱한 목숨들이 일렁이며 흘러가는 이 도시에서
뒤척이며, 뒤척이며, 그러나
같은 자리로 내려앉는 법이 없는
저 물결, 위에 쌓았다 허문 날들이 있었다
거대한 점묘화 같은 서울,
물결, 하나가 반짝이며 내게 말을 건넨다
저 물결을 일으켜 또 어디로 갈 것인가





호박젓국

- 장석주


어린 별 두엇 떠 있는 초저녁 하늘을 보며 마당을 건너
와 저녁밥을 짓는다. 그렇잖아도 뭘 먹을까, 하던 참에
태정이 어머니가 텃밭에서 딴 애호박 두 덩이를 갖고 어
둑어둑한 어둠 밟으며 내려온다. 애호박 썰어 참기름 두
른 냄비에 볶은 뒤, 마늘 한 숟갈, 새우젓 한 숟갈, 고춧
가루 약간, 물 한 컵 넣고 자작자작 물 졸아들 때까지 끓
인다. 날 궂어 창호지 바른 문짝에 싸락싸락 싸락눈 부
딪치는 초겨울 저녁나절 쌀뜨물 받아 새우젓 풀어 끓인
어머니의 호박젓국이 내 피를 만들고 뼈를 키웠다. 오늘
은 쌀뜨물 없으니 맹물로 끓인다. 흙냄새 향긋한 애호박
이 참기름 새우젓 속에 뒹굴며 제 속에 지그시 품고 있
던 진국을 기어이 토해낸다. 이 슴슴하고 따뜻한 호박젓
국을 뜨며 어머니를 생각한다. 열무김치 놓고 밥 한 공
기 뚝딱 해치우는 동안 밤하늘엔 집 나온 별들이 더 많
아졌다. 호박젓국은 씹을 틈도 없이 녹고, 입맛이 동해
밥 한 공기 더 뜨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는다. 다시 마당
에 나오니 슬하에 저녁마다 된똥 누는 말 안 들어 미운
일곱 살짜리 아들이라도 하나 두고 싶은 적요寂寥가 사
방에 꽉 차 있다. 어린 아들이라니! 숫국의 삶은 이미 멀
어져 버렸으니 그건 분수에 맞지 않다. 그저 새초롬한
앵두나무 두 그루와 어여쁜 시냇물 소리나 키우는 수밖
에 없다. 지금쯤 신흥사 저녁 예불 알리는 범종梵鐘운 뒤
설악산 화채봉 능선 위로는 보름 지난 달 둥두렷이 떠올
랐을 게다.




달밤에 숨어

- 고재종


외로운 자는 소리에 민감하다.
저 미끈한 능선 위의
쟁명한 달이 불러 강변에 서니,
강물 속의 잉어 한 마리도
쑤욱 치솟아오르며
갈대숲 위로 은방울들 튀기는가.
난 나도 몰래 한숨 터지고.
그 갈대숲에 자던 개개비 떼는
화다닥 놀라 또 저리 튀면
풀섶의 풀 끝마다에
이슬농사를 한 태산씩이나 짓던
풀여치들이 뚝, 그치고
난 나도 차마 숨죽이다간
풀여치들도 내 외진 서러움도
다시금 자지러진다. 그 소리에
또또 저 물싸린가 여뀌꽃인가
수천 수만 눈뜨는 것이니
보라, 외로운 것들 서로를 이끌면
강물도 더는 못 참고 서걱서걱
온갖 보석을 체질해대곤
난 나도 무엇도 마냥 젖어선
이렇게는 못 견디는 밤.
외로운 것들 외로움을 일 삼아
저마다 보름달 하나씩 껴안고
생생생생 발광發光하며
아, 씨알을 익히고 익히며
저마다 제 능선을 넘고 넘는가.
외로운 자는 제 무명의 빛으로
혹간은 우주의 쓸쓸함을 빛내리.




물렁해, 슬픈 것들

- 김신용


마당가의
작은 텃밭에 씨 뿌려 튀운 어린 배춧잎에
쬐그만 달팽이들이 기어오른다
흙빛의 보호색을 띤
물렁한 것들,
낮이면 흙 속에 엎드려 있다가
밤이면 몰래 배춧잎을 기어오르는
마치 텃밭이 자신을 위해 차려놓은 풍성한 식탁인 것처럼
포만에의 기대감으로 잔뜩 몸을 늘어뜨린, 야행성들

그 연체의 흐느적거림이 비애스럽지만
이빨이 없어, 부드러운 새싹부터 갉아 먹는 食性들의 습격을 받으면
배추밭은 전멸이므로
어쩔 수 없이, 밤마다 손전등 불빛을 켜들면
그 불빛이 닿을 때마다 잽싸게(?) 흙빛의 보호색을 띤 패각 속
으로 몸을 웅크리고
물방울처럼, 흙바닥으로 도르르 굴러 떨어지는 것들
밟으면, 뱉아놓은 침처럼 힘없이 으깨지는 것들
무섭다.
한때, 나도 은유의 달팽이였다.
지게를, 달팽이의 집처럼 등에 얹고, 세상의
배춧잎을 기어오르던ㅡ.

세상이
자신 앞에 차려진 풍성한 식탁인 줄 알고
어두워지면, 맛있게 갉아먹던 그 벌레의 길이
자신의 길인 줄도 모르고ㅡ.

오늘도
세상의 식탁앞에 앉은, 물렁해
슬픈 것들ㅡ.
자신의 지킬 뼈 하나 없어, 등에 짊어진 패각까지 보호색을 띤
은유의 달팽이들.
그 야행성들ㅡ.
2008-02-17 07:5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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